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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대명사 이완용이 실제로 극일파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어릴 적 그는 신동으로 온 조선팔도에 소문이 날 정도로 똑똑했다고 한다.
이후 조정에 들어온 이후 조선 조정 및 이후 대한제국 정부 내에서 가장 학식깊고 사려깊은 인물로 통하였고,
그로 인해 광무황제가 이전 고종일때부터 매우 총애를 받았던 자였던 것이다.

사실 그는 미국 세력 및 이후부터는 러시아 세력과 더욱 친한 사람으로,
20세기가 되기 전 까지는 일본 세력을 밀어내려고 노력하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물론 일본 세력을 밀어낸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민족주의 성향의 인사는 아니기에
다른 나라가 들어왔겠지만 말이다.

독립문 현판을 쓸 정도로 독립협회와도 관련깊던 그는
그의 영향력을 잘 알고 있던 일본이 그를 죽이려고 한 적도 있었을 정도이다.

하지만 이후 친일파로 변절하여 많은 만행을 저질렀는데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는 정말 매국노로 통하겠지만
제 3자 입장에서 보면 그저 처세술의 달인 정도로 느껴질 정도이다.

그런 자가 좀 더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안타깝다...





티스토리에 옮겨오기전 구글 블로거에서 썼던 내용의 글인듯 합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문제있는 발언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네요. 다만 개인적인 역사관에 있어서 의문점이 드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그점에 대해서 포스팅을 한것인데요. 광복절을 막 지난 현시점에서 발행할만한 적절한 글은 아니라고 생각이 들긴 합니다.

안중근 의사는 분명 당시 대한제국의 주적이었던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한 우리 민족의 의사입니다라는 사실은 변함 없습니다. 혹여나 위 글을 보시고 나서 제 역사의식에 대해 반문을 품을지도 몰라서 이렇게 새로운 글을 하나 포스팅하게 되네요.

전 친일주의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민족주의자도 아닙니다. 그저 자신의 정치적 견해와 역사적 견해에 대해 작은 글을 남기는 평범한 대한민국 시민일 뿐입니다.

위 글을 읽고 저에게 오해하시는 분이 없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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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대부분의 국내 역사책 및 서적은 그를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당한 사람이며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민족의 원수로 표현한다. 그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는 씻을수 없는 어두운 과거를 준 일본인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대한민국 4천만 시민들에게 욕을 들을 각오하고 한마디 던져보도록 한다.

그 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민족의 원수였지만, 그는 대한제국*이하 한국*을 병탄하려는 일본의 다른 대신들과는 다르게 대한제국 병탄을 반대했던 인물이었다. 1909년 7월 6일 일본 내각에서는 한국 병탄에 대해 확정해 놓았던 상태였으나, 그는 1909년 7월 29일 연설에서 "일본은 한국을 합병할 필요가 없다. 합병은 매우 성가신 문제" 라고 주장하여 한국 병탄을 반대했던 인물이었다.

그의 일본 국내에서의 영향력이나 권력으로 봐서 반대파들에 의한 모함 혹은 암살이 없었을 경우, 일본의 한국 병탄계획은 상당한 차질이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여 기서 안중근은 그를 죽임으로 인해 일본 최고위층 인물 중에 한국 병탄을 반대하는 유일한 인물을 죽이게 된 것이다. 안중근의 결정 및 행동은 우리 민족을 위해 몸을 내던진 의로운 일이었으나, 결국은 일본에 의한 한국 병탄이라는 경술국치를 앞당긴 결과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생각한다.

실제로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이유가, 일본에 의한 한국 병탄 계획 단행의 신호탄이 된 것이었다. 이런 것이야 말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역 사에서 가정법은 가장 위험한 추론방법이다. 하지만, 민족 최대의 수치인 경술국치의 아쉬움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시 일본 최고의 실권을 가진 이토 히로부미가 죽지 않고 계속적으로 병탄에 반대하였다면 우리가 과연 일본에 완전히 병탄되는 일은 없었을 지 모른다.

나는 친일파도 민족주의자도 아니다. 이 글은 필자가 제 3자의 입장에서 쓴 글이다. 이 글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나를 친일파라 욕을 해도 좋다. 하지만, 역사는 해석하는 자들의 몫이다. 필자가 쓴 이 글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하고 글과 생각에 대한 비판은 얼마든지 환영하나, 필자 자신에 대한 색깔이나 친일논쟁은 하지 않았으면 바램으로 이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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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한]

한반도 남부지방에서 최초의 소국에 대한 기록과 국명들은 중국의 역사책인 『삼국지』에 보이고 있다. 그 책에 의하면 삼한(마한, 진한, 변한)이 있었는데 마한에는 54개의 소국이 있었고, 진한과 변한에는 각각 12, 13개의 소국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삼한 이전 중국에선 한반도 국가 전체를 개마국(蓋馬國) 혹은 개국이나 진국으로 불렀다.



[마한]

감해국(感奚國),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 건마국(乾馬國), 고랍국(古臘國), 고리국(古離國),*고비리국(古卑離國), 고원국(古爰國), 고탄자국(古誕者國), 고포국(古蒲國), 구로국(狗盧國), 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 구소국(狗素國), 구해국(狗奚國), 내비리국(內卑離國), 노람국(怒藍國), 대석삭국(大石索國), 막로국(莫盧國), 만로국(萬盧國),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 모수국(牟水國), *목지국(目支國), *백제국(伯濟國), 벽비리국(辟卑離國), 불미국(不彌國), *불사분사국(不斯濆邪國), 불운국(不雲國), 비리국(卑離國), 비미국(卑彌國), 사로국(駟盧國), 상외국(桑外國), 소석삭국(小石索國), 소위건국(素謂乾國), 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 신분활국(臣濆活國), 신소도국(臣蘇塗國), 신운신국(臣雲新國), 신흔국(臣國), 아림국(兒林國), 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 *염로국(冉路國), 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 원양국(爰襄國), *원지국(爰池國), *일난국(一難國), 일리국(一離國), 일화국(日華國), 임소반국(臨素半國), 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 지반국(支半國), *지침국(支侵國), 첩로국(捷盧國), 초리국(楚離國), 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 치리국국(致利鞠國).



[진한]

사로국(斯盧國), 기저국(己柢國), 불사국(不斯國), 근기국(勤耆國), 난미리미동국(難彌理彌凍國), 염해국(冉奚國), 군미국(軍彌國), 여담국(如湛國), 호로국(戶路國), 주선국(州鮮國), 마연국(馬延國), 우유국(優由國)



[변한]

미 리미동국(彌離彌凍國), *접도국(接塗國),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고순시국(古淳是國), 반로국(半路國), *악노국(樂奴國),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 감로국(甘路國), 구야국(狗邪國), 주조마국(走漕馬國), 안야국(安邪國), 독로국(瀆盧國), 군미국(軍彌國)



※ 변한은 12~13개 국이라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군미국은 현재 진한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위의 목록은 <삼국지> <동이전>을 참고 하였습니다.







[고구려에 병합된 소국]

고죽국, 개마국(蓋馬國), 비류국, 행인국, 구다국, 갈사국, *해두국



*해두국

부여왕 대소의 아우가 갈사국을 세우기 전 그 땅에 있던 왕국으로 추정. 사냥 나온 해두국왕을 죽이고 그 곳 나라를 취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신라에 병합된 소국]

* 우시산국(于尸山國), *거칠산국(居漆山國), 이서국(伊西國)(=이서고국(伊西古國)), 압독국(押督國), *조문국, 감문국(甘文國), 사벌국(沙伐國)(=사량벌국), 골화소국(骨火小國)(=골벌국), 맥국(貊國), *창녕국(昌寧國), *구령국(驅令國), *소라국(召羅國), 우산국, 비지국(比只國), 다벌국(多伐國), *초팔국(草八國), 소문국(召文國), 실직국(悉直國)





*우시산국(于尸山國)

우시산국은 지금의 웅촌면과 웅상면 일대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 중 심지는 웅촌면 검단리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석탈해왕때 거도라는 사람이 신라에 합병하였다고 한다.
우시산국에서 시(尸)는 [이두]에서 "ㄹ"로 많이 표기되는데 "우"와 "시" 를 합치면 "울"이 된다. 그래서 울산은 "울뫼나라"즉 울산국이 되는 것이다.


*거칠산국(居漆山國),

거 칠산국은 지금의 황령산(荒嶺山)쪽을 비정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독노국, 장산국 또는 내산국등으로 표기하는 곳이 이 지역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서기 57∼79년 사이 신라 제4대 석탈해왕 때 거도(居道)장군이라는 장군이 장토야(張吐野)라는 들판에서 말놀이를 하므로 주민들은 해마다 하는 행사라고 여기고 또한 그를 마숙이라고까지 칭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군사를 일으켜 거칠산국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이 멸망된 땅에 서기 505년 신라는 제22대 지증왕 6년에 와서 한곳은 거칠산국(居柒山國) 또 한곳은 갑화양곡현(甲火良谷縣) 그리고, 한곳은 대증현으로 각각 고을을 설치하였다. 이로서 최초에 고을이 탄생됐다. 서기 757년 신라 경덕왕 16년에 와서 전국적으로 고을의 이름을 한자로 개칭할 때, 거칠산군은 지금의 東來로 갑화양곡현은 기장(機張)으로 개칭되었다. 갑화양곡현으로 존속한 기간이 252년, 기장으로 불러진 이래 지금까지 1243년이다. 고을이 생긴 이후 무려 천오백년의 긴 역사를 가지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문국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을 중심으로 형성된 고대 국가로 서기 185년 경에 서라벌에 병합되고 통일신라시대 지명을 한문어휘에 맞도록 고칠 때(신라 35대 경덕왕) 문소군으로 불려졌다가 고려초에 의성부로 개칭되었다. 조문국의 마지막 왕 경덕왕릉이 전해진다.



*창녕국(昌寧國)

현재의 안동땅으로 신라 혁거세 원년 (BC57)에 염상도사(念尙道士)가 세웠다. 초기 신라의 속국이였다.



*구령국(驅令國)

현 재 경북 봉화군 일대로, 句利王(구리왕)이 나라를 세우고 살았다는 황터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약 1980년대까지만 해도 동네 앞 숲에 당집이 있었고 그 안에는 구리왕의 위패와 구리왕에 대한 내력을 적은 기록문과 높이 약 15cm, 길이 약 20cm정도 크기의 구리로 만든 말 두 마리가 함께 보존돼 있어 매년 음력 대보름이면 마을에서 나는 곡식으로 5일간 근신한 제관들이 제사를 지내 왔었는데, 구리로 만든 말 두 마리는 약 1980년에 분실되었고, 위패와 기록문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당시 당집에 불을 놓아 소실되었다. 그후 동네사람들이 구리왕 유적이 없어진 것을 몹시 아쉬워하고 있던 차 82년도에 황터마을내 고층계에서 기금을 모아 옛날 당집자리에 비석을 세워 다시 옛 유적을 보존케 되었는데 그 비문에는 句利王位牌墓基城隍位(구리왕위패묘기성황위)라 적혀있다. 그리고 황터 북동편 소라리로 넘어가는 재 이름이 성재이고 그 잿마루에 직경 20cm 정도(인두석) 강돌을 주워다 석성을 쌓았던 유적이 남아 있는 것을 보아도 구리왕 전설의 흔적이 엿 보인다. 또한 이 지방 전설에 의하면

"구령왕국)이 군사 30명을 동원하여 소라국을 토벌하다"

라 는 기록이 新增東國與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있는데 그 九靈國(구령국)은 서벽2리 금정골안 高直嶺(고직령) 밑 골짜기에 있었다고 하며, 召羅國(소라국)은 서벽리에 있는 소라리라는 동명으로 미루어 볼때, 소라리 아니면 황터에 부족국가가 있어서 두 나라가 싸운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소라국(召羅國)
안동 근처에 위치한 소국으로 구령국과 인접해 있었으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우산국

현재의 울릉도와 독도로 비정된다. 왕관 등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512년 신라 장수 이사부가 대규모의 군대와 목우사자라는 신무기를 동원하여 마침내 우산국을 신라에 귀속 시킨다.



*초팔국(草八國)

현재의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과 초계면 사이에 있던 진한의 부족국가 중 하나였다. 파사 이사금 29년(108년)에 비지국 , 다벌국 과 함께 신라 에 복속되어 초팔혜현(草八兮縣)이 되었다.







[가야]

가야는 변진(弁辰) 또는 변한(弁韓)으로 불리웠던 12국이 발전하여 여섯 가야가 되고 이들이 뭉쳐서 연맹체를 형성하여, 구야, 가라, 가량, 가락 등으로 불렸다.



《삼국유사》의 5가야조에는 아라가야(阿羅伽耶) · 고령가야(古寧伽耶) · 대가야(大伽耶) · 성산가야(星山伽耶) · 소가야(小伽耶) · 금관가야(金官伽耶) · 비화가야(非火伽耶) 등이 있고,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고령가야 · 금관국 · 아시라국(阿尸良國) · 대가야국(大加耶國) 등이 나타나 있다.



또 한, 《일본서기》에 전하는 것으로서 남가라(南加羅) · 탁순(卓淳) · 탁기탄(啄己呑)과 멸망 당시의 이른바 임나십국(任那十國)인 가라국(加羅國) · 안라국(安羅國)(= 아라가야) · 사이기국(斯二岐國) · 다라국(多羅國) · 졸마국(卒麻國) · 고차국(古嵯國) · 자타국(子他國) · 산반하국(散半下國) · 걸찬국(乞飡國) · 염례국(稔禮國) 등이 있다. 그 중에서 지명고증이 대개 일치하는 것은 김해(狗邪國 · 金官伽耶 · 金官國 · 南加羅) · 함안(安邪國 · 阿羅伽耶 · 阿尸良國 · 安羅國) · 고성(古資彌凍國 · 小伽耶 · 古嵯國) · 합천(多羅國) · 고령(大伽耶 · 大加耶國 · 加羅國) 라고 한다.







[포상 8국(浦上八國)]

*골포국(骨浦國), 칠포국(柒浦國)(철원), 고사포(고성), 사물국(사천), 독로국(거제), 고자국(고자미동국)(통영), 보라국(保羅國), 곤미국



*포상 8국(浦上八國)

포상의 8국으로 201~212년 동안 존속하였다. 김해의 해상교역권을 빼앗기 위해 가락국을 공격하였으나, 신라의 간섭으로 실패하고 만다.



*골포국

포상팔국 중 일국으로 현재의 마산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문무왕 16년(676년), 골포현이 되고 굴자군 (지금의 창원)에 속하게 되었다.


출처 - 우리나라 고대왕국, 역대소국

뭐 다들 알다시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언어는 서로 통하지 않았다는게 최근 학설입니다. 여느 드라마나 학교 역사책을 보아도 같은 민족이라고만 서술했지 언어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한국어는 고대 신라어에서부터 시작하였고 고려, 조선을 이어서 현대까지 왔다는 것이다.

그럼 과연 고구려어와 백제어는 어떤 것이었을까? 최근 연구되고 있는 학설에 의거하면 당시의 고구려어는 일본어와 일맥 상통하는 바가 많다고 전한다. 일부 서적과 유적에 남아있는 고구려어의 흔적이 고대 일본어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또한 고구려어는 우리의 어원이라고 알려지는 퉁구스어와 비슷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이다. 이에 일본어 또한 퉁구스계 언어라고 보는 것이 맞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백제어인데, 백제의 경우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간의 언어가 서로 달랐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다. 이는 백제 지배계층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갈라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에 백제의 지배계층 언어는 고구려어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백제에 거주하는 토착 민중은 이전에 존재하였던 마한어를 계속 사용한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간의 융화가 어려웠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증거이다. 여기서 고구려어와 백제 지배계층 언어가 비슷하다고 하였는데, 고대 백제인들은 일본인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어, 백제 지배계층어, 고대 일본어는 거의 같은 언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백제의 경우 대부분의 민중이 사용하는 언어가 지배계층이 사용하는 언어와 달랐다는 사실로 고구려의 언어와는 다르다고 봐야 하는 견해가 옳다고 본다.

신라어의 경우, 진한어를 거쳐 신라어로 발전하였으며 고구려, 백제와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언어의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삼국 통일로 인해 고려어로 발전하게 된다. 고대 신라어를 가장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향가인데 그것의 해독이 이렇다 할 방법론의 검토도 없이 중세한국어에 전적으로 의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었음은 신라어와 중세한국어의 본질적인 일치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물론, 삼국의 언어는 서로 친족간이다. 하지만, 민중들간의 언어의 소통은 서로 어려웠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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